◆ CEO / 주한미군 떠난 용산 용지 1조원에 매입한 엄석오 일레븐건설 회장 ◆
경기도 성남시 분당 본사에서 만난 엄석오 일레븐건설 회장(69)은 유엔사 용지를 매입한 이유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난달 말, 서울 부동산 시장은 두 번 들썩였다. 이태원동 '용산공원정비구역 복합시설조성지구(옛 유엔사 용지)'가 1조원이 넘는 가격에 팔렸다. 시내 한복판 금싸라기 땅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한 번 더 놀란 이유는 용지를 낙찰받은 곳이 '일레븐건설'이라는 다소 생소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유엔사 용지는 낙찰받을 수 있다는 '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죠."
엄 회장이 꿈꾸는 유엔사 용지 개발 청사진은 한 마디로 '전대미문'이다. 과거와 현재 언제든, 세계 그 어느 곳이든 없었던 최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땅을 낙찰받자 사람들이 '일본의 롯폰기힐스처럼 만드는 것이냐, 홍콩의 트웰브픽스를 참고할 것이냐' 등 질문을 해왔지만 어느 것도 단순히 흉내내진 않을 생각"이라며 "상상이 현실로 구현된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명소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일레븐건설은 유엔사 용지를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고 단일 업체로서 사들였다. 컨소시엄 제안이 많았지만 자신의 철학을 밑그림으로 개발하겠다는 의지에서다.
엄 회장은 조만간 설계 등을 맡을 국내외 업체 물색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낙찰을 받자마자 해외 유명 건축 설계업체들이 연락을 해왔고 설계 구상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유통업계에서 입점·임대 제안도 온다"며 "일레븐건설의 구상을 그대로 구현할 능력이 있는 업체와 손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사 용지를 안게 된 과정도 엄 회장의 개발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입찰 전 그는 혼자서 유엔사 용지를 비롯해 용산 이태원 일대를 수없이 걸어다녔다. 아침부터 낮, 밤으로 시간을 달리해서도 가봤다. 수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평일에도 찾아가고 주말에도 발걸음했다. 다른 유명 상권과 비교하기 위해서 명동과 강남역도 다녀왔다. 그는 "유엔사 용지는 용산민족공원(가칭)과 남산, 한강 그리고 이태원 상권의 중심에 있다"며 "서울이 글로벌 도시 경쟁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대표 상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말했다.
유엔사 용지는 상업시설로 지어야 하는 비중이 30%에 달한다. 일부에서는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말도 나왔지만 엄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유엔사 용지는 6·25전쟁을 겪은 우리나라 역사의 상징성이 담긴 곳인 데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중심 입지"라며 "돈을 벌기 위해 상가를 꾸민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벗어나 아파트에 입주할 주민과 이태원을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매력적인 고급주상복합 문화 공간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호텔도 세계 최정상 6성급 호텔을 넣고 백화점도 VVIP급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엄 회장은 "조경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갖추고, 단지 내에는 예쁜 개울이 흐르는 등 자연친화적으로 구성할 것"이라며 "유엔사 용지와 용산공원을 잇는 구름다리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부동산개발 업계에선 1세대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로 꼽힌다. 정부 주도의 부동산개발이 이뤄진 국내에서 보기 드문 민간 정통 디벨로퍼로 성장해 왔다. 본격적으로 디벨로퍼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부터 엄 회장은 달랐다. 땅 주인을 비롯해 개발 반대세력을 찾아가 함께 울고 웃으며 참여를 끌어냈다. 그는 "같이 소주를 마시며 사는 얘기를 하고, 울기도 하고 아쉬운 소리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땅 주인들의 동의를 받아내 성공한 첫 작품이 용인 수지구 일대 주거개발사업이었다"고 말했다. 1996년부터 용인시 일대 부동산개발사업에 나서 1만5000여 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하며 10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엄 회장은 "하나하나 직접 땅 주인을 찾아가 설득한 후 매입하고 사업 인·허가를 받으러 다니며 일해 왔다"며 "소유권이 정리된 땅을 사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태원을 수없이 오간 것도 '직접 현장을 찾아야 사람의 마음을 읽고 땅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개발 철학 때문이다.
그는 용인을 또 한번 도약시킬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중요도로 따진다면 유엔사 용지 사업보다 더할 수도 있다. 용인시와 함께 남사지구 일대에 여의도 면적의 2.5배 정도인 땅(7.2㎢)에 주거·호텔·쇼핑·업무시설 등 미니 복합신도시를 짓는 프로젝트다.
8월 이후에는 49층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서 분양할 예정이다. 내년까지 수지구 신봉동과 죽전동 일대 도시개발사업지구에서 4500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한 인허가를 진행 중이다. 용인 외에 인천과 김포 등지에서도 1만가구 이상 대형 단지를 개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남의 땅을 사고 돈을 벌어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엄 회장이 여러 사람을 설득해 땅을 사들이고 성공적으로 개발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엄 회장은 20세에 서울로 올라와 전집 세일즈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책을 팔아 번 돈으로 세운 양우당은 1980년대 대형 출판사로 이름을 날렸다. 돈벌이의 철학을 담은 일본 소설 '전화(錢花)' 판권을 사들여 출간한 이후 우리 근현대사의 재벌 이야기를 다룬 전집 '거부실록', 김승옥·최인훈·김홍신 등 쟁쟁한 문인들을 꼽아 '국내 대표 소설가 33인 전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거칠고 험한 이미지로 통하는 부동산 업계로 옮겨온 것은 출판인 시절 본인 돈을 들여 임대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엄 회장은 "다른 시행사와 달리 어음이나 프로젝트파이낸싱(PF)은 되도록 손대지 않으려 한다"며 "남의 돈을 들이면 자신 생각대로 개발하지 못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 회장의 경영 철학은 '정직함과 신뢰'다. 들꽃을 좋아한다는 그는 "상대방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공한 사업은 향기 없는 꽃이나 마찬가지"라며 "최소 10년은 걸리는 부동산개발에서는 중간중간 힘들더라도 변치 않는 믿음을 쌓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엄 회장은 여전히 바쁘다. 시행업무를 하고 있지만 일레븐건설이 시공하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챙기기도 한다. 일레븐건설이 짓는 '파크사이드' 아파트에서 소나무를 비롯한 단지 조경 조성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식이다.
'어떤 땅이 좋은 땅이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고개부터 저었다. "사놓기만 하면 오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과학적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개발해서 어떤 가치를 넣느냐에 따라 땅값은 달라집니다." 엄 회장은 "그래서 쉼 없이 현장을 찾아 아이디어를 찾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엄 회장은 인생과 사업, 경영에 대해 말하면서 꽃에 빗댄 표현을 즐겨 썼다. 마지막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꽃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 혹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라는 말처럼 꽃이란 언젠가는 지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건설업의 미래에 대해 엄 회장은 "사양산업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지만 인류와 지구가 존재하는 한 미래와 발전이 필요하다"며 "건설업은 생활과 삶의 터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무한한 희망이 담긴 분야"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한국을 대표하는 디벨로퍼가 꿈꾸고 있는 용산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지 더욱 궁금해졌다.
"남의 것 빼앗는 성공은 향기없는 꽃…신뢰로 버텨"
출판인서 디벨로퍼 변신 20년
실제 부동산 업계를 들여다보면 눈여겨 볼 만한 시행업체 중 하나가 일레븐건설이다. 일레븐건설은 용산 유엔사 용지 낙찰 이전까지는 일반인들 눈길을 크게 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회사는 대규모 택지 개발과 탄탄한 경영에 따른 현금 보유력으로 신용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1조원이 넘는 유엔사 용지 낙찰 당시 LH가 눈여겨 본 것 중 하나가 현금 조달 능력이었다"며 "시중 주요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겠다고 앞다퉈 나설 정도로 업계에선 안정적인 사업 파트너로 통한다"고 말했다.
일레븐건설은 일부 시행사들처럼 용지 매입 계약금(10%)만 가지고 과도하게 PF대출을 일으키는 대신 현금 유동성을 먼저 확보한 후 사업에 들어가는 식으로 운영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국내에 미치면서 국내 주택시장도 침체기에 접어들던 2010~2013년에는 일레븐건설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4년 이후 사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주택경기가 회복세를 보인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회사는 크게 성장했다.
일레븐건설은 경기도 '용인의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용인 일대 개발이 본격화되던 시기인 1990년대 말 주요 택지지구를 개발해 1만5000가구가 넘는 집을 공급했다. 일레븐건설이 지도를 바꿔놓은 수지구 일대는 이제 '용인의 강남'으로 통한다. 대부분 '대형 브랜드 단지'들이 일레븐건설 작품이다.
엄 회장은 1999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일대에서 2253가구 아파트 개발을 한 후 2000년대 초 수지구 신봉마을LG자이(4000여 가구), 2008년 수지구 성복동(힐스테이트·자이 3600여 가구) 사업을 하면서 회사를 키웠으며, 최근에는 수지구에서 더샵 브랜드로 상현동 479가구, 동천동 1310가구를 공급했다. 서울에서도 강동구 SK허브 주상복합과 동대문구 회기동 주상복합 아파트를 공급한 바 있다. 오는 8월 이후에는 용인 시내에서 가장 높은 49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분양하는 데 이어 같은 신봉동에서 3500가구 규모 도시개발사업 인·허가를 진행 중이며 내년 초 공급 예정이다.
일레븐건설이 낙찰 받은 유엔사 용지는 주거·업무·문화시설이 함께 들어서는 복합단지로 개발될 예정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시·용산구와 함께 건축물 배치와 외관·경관 등 계획안을 만들어야 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의 도시재생사업을 비롯한 용산 일대 낙후지 개발을 고려해 용산 일대 전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질 때 유엔사 용지 사업 윤곽도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시행사 외에 시공사로서의 일레븐건설은 자체 아파트 브랜드인 '파크사이드'와 오피스텔 브랜드인 '유니큐브'를 갖고 있다. 올해 2월 엄 회장의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해남 파크사이드 2차'를 분양하기도 했다.
■ He is…
엄석오 회장의 개인 이력은 간단하다. 1948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20세 무렵 상경해 전집 세일즈맨 생활을 하다 1980년 출판사 양우당을 설립했고, 1991년 일레븐건설을 세운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디벨로퍼로서의 성과는 대단하다. 1999년 용인시 수지
[김인오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